연필로 이름 쓰는 투표와 1/3이 세습인 국회의원들 : 일본의 정치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일본은 아시아의 대표적인 민주주의 국가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그 화려한 외관 뒤에 숨겨진 일본 정치의 실상을 들여다보면,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들이 심각하게 왜곡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오늘은 일본의 독특하고 문제적인 정치 시스템에 대해 깊이 파헤쳐보겠습니다.
천황제와 자민당 일당독재의 공고화
일본은 헌법 제1조에 "천황은 일본국의 상징이자 일본 국민 통합의 상징이며, 이 지위는 주권이 존재하는 일본 국민의 총의에 근거한다"라고 명시하며 천황이 국민 위에 있음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이는 현대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인 국민주권과는 거리가 있는 모습입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자민당의 일당독재 체제입니다. 1955년 창당 이래 자민당이 정권을 내준 것은 단 2회뿐이며, 그 기간을 모두 합쳐도 6년이 채 되지 않습니다. 민주주의의 핵심인 '투표를 통한 정권 교체'가 거의 작동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민당 정부가 아무리 큰 사고를 치고 지지율이 떨어져도, 다음 선거에서 정권을 잡는 것은 결국 자민당 내 다른 파벌일 뿐입니다.
선거제도 개혁의 역설적 결과
1994년 자민당과 극우세력들이 강력 추진한 중선거구제에서 소선거구제로의 전환은 오히려 자민당 일당지배를 더욱 강화시켰습니다. 원래 중선거구제 하에서는 한 선거구에서 3~5명을 뽑았는데, 거대 자민당이 복수 후보를 내면서 자민당 내 파벌간 담합 등의 부작용이 생겼습니다.
이를 막겠다는 취지에서 소선거구제로 바꿨지만, 결과는 정반대였습니다. 국민들이 자민당 후보만 뽑게 되면서 야당의 입지는 오히려 더욱 어려워졌습니다. 개혁이 오히려 기존 권력구조를 더욱 공고히 만든 아이러니한 상황이 벌어진 것입니다.
기이한 패자부활전: 석패율제도
일본 선거의 독특한 특징 중 하나는 '석패율'이라는 패자부활전 시스템입니다. 소선거구에서 낙선한 후보라도 비례대표 권역에 중복 입후보했다면, 소선거구 득표율(석패율)에 따라 비례대표로 당선될 수 있습니다.
이 제도는 겉보기에는 합리적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기득권 정치인들에게 유리한 안전장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지역구에서 떨어져도 비례대표로 되살아날 수 있다는 것은 기존 정치인들의 기득권을 보장하는 장치로 작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깊이 뿌리박힌 정치 무관심
일본 국민들의 정치에 대한 무관심은 매우 심각한 수준입니다. '정치는 참여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생각이 미덕으로 여겨질 정도입니다. 이러한 무관심은 집권당에서 의도적으로 조장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실제로 최근 투표율 분석 결과, 투표율이 높을수록 자민당의 득표율이 낮았고, 투표율이 낮을수록 자민당에게 유리했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투표율이 낮을수록 조직표가 탄탄한 자민당에게 유리하다는 분석이 나오면서, 자민당이 의도적으로 투표율을 높이려 하지 않는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여론조사에서도 이러한 무관심의 실태가 드러납니다. '왜 투표율이 낮은가'라는 질문에 43%가 '투표해도 정치는 바뀌지 않기 때문'이라고 답했고, 32%는 '정치에 관심이 없기 때문'이라고 응답했습니다.
갈라파고스화된 투표 시스템
일본의 투표 시스템은 정말로 독특합니다. 대부분의 국정선거에서 투표자가 후보자의 이름을 직접 손으로 써야 합니다. 투표용지에 사람 이름을 직접 적어야 하며, 고쳐 쓰면 무효가 됩니다.
이러한 시스템은 여러 문제를 야기합니다:
세습 정치인들의 절대적 우위
잘 모르는 사람들이 익숙한 이름을 쓰기 때문에 몇 대에 걸쳐 지역구에서 의원을 한 세습 의원들이 절대적으로 유리합니다. 정치인 가문들은 자식의 이름을 쉬운 한자로 짓거나, 아예 선대의 이름으로 개명한 후 선거에 출마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정당명 혼란 문제
2023년 야당인 입헌민주당과 국민민주당이 모두 정식 약칭을 '민주당'으로 고집했습니다. 결국 정확한 구분 없이 그냥 '민주당'이라고 적은 무효표가 362만 표나 나왔고, 이를 각 정당 득표 비율에 맞춰 임의 배분하는 촌극이 벌어졌습니다.
연필 깎기 소동
법으로 연필로만 투표하도록 되어 있는데, 코로나19로 인해 연필을 공유할 수 없게 되자 지자체에서 수십만 개의 연필을 조달하고 공무원들이 직접 깎아야 하는 웃지 못할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세습정치의 왕국
일본의 세습정치 실태는 충격적입니다:
- 중의원 전체의 23.4%가 세습의원이며, 자민당으로 한정하면 1/3 수준
- **세습 후보의 당선 확률은 80%**인 반면, **비세습 후보는 30%**에 불과
- 1991년부터 2021년까지 30년간 세습정치인이 아닌 총리가 집권한 기간은 총 5년에 불과
- 2000년대 이후 일본 총리 10명 중 7명이 세습 정치인
이런 상황에서 "정치체계가 막부시대에서 별로 발전한 게 없다"는 비판이 나오는 것도 당연합니다.
개혁 의지의 부재
이러한 문제점들이 지속적으로 지적되고 있지만, 선거 시스템을 개혁하려는 의지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집권당인 자민당에서는 "유권자가 직접 이름을 적어 뽑아준데 자부심을 느낀다", "정치가는 (유권자가 자신의) 이름을 쓰게 하는 것이 일이다"라는 이상한 논리로 반대하고 있습니다.
일본인 특유의 "옛날부터 그랬다"라는 마인드와 결합되어, '갈라파고스화되고 있다'는 지적에도 불구하고 변화는 요원해 보입니다.
어찌되었든.. 형식적 민주주의의 한계가 있습니다.
일본의 사례는 제도적으로는 민주주의를 표방하지만, 실질적으로는 과두제에 가까운 정치체제가 어떻게 유지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교훈적인 사례입니다.
천황제라는 전근대적 요소, 세습정치, 갈라파고스화된 선거제도, 의도적으로 조장되는 정치적 무관심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겉으로는 민주주의 국가이지만 실제로는 소수의 기득권층이 권력을 독점하는 구조가 공고히 유지되고 있습니다.
이는 단순히 일본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민주주의는 제도만으로는 완성되지 않으며, 시민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견제, 그리고 지속적인 개혁 의지가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점을 일본의 사례가 명확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역시 이러한 일본의 사례를 거울삼아, 진정한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깊이 성찰해봐야 할 때입니다.